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났다.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 마가레트(70) 수녀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난 것은 지난 2005년 11월 21일.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스도왕의 수녀회’ 소속인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 사업에 헌신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다.
이들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이 편지로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
김명호(56) 소록도 주민자치회장은 “주민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며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 두 수녀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 있다”고 말했다.
40년 봉사 접고 말없이 떠난 소록도 두 천사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주민들이 열흘 넘게
성당과 치료소에 모여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43년 동안 환자들을 보살피다 지난달 21일 귀국한
오스트리아 수녀 두 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별의 슬픔을 누르는 기도다.
마리안네 스퇴거(71), 마가레트 피사렉(70) 수녀는 주민들에게
헤어지는 아픔을 주기 싫다며 ‘사랑하는 친구·은인들에게’라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새벽에 몰래 섬을 떠났다.
두 수녀는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할 때”라며 “부족한 외국인이
큰 사랑을 받았다”고 오히려 감사했다.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는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소속 수녀회에 전해지자
1962년과 66년 차례로 소록도에 왔다.
두 사람은 섬에 발을 디딘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마리안네 & 마가레트' 라는 표찰이 붙은 방에서 환자를 보살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
오후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워 들고 마을을 돌았다.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다.
꽃다운 20대는 수천 환자의 손과 발로 살아가며 일흔 할머니가 됐다.
숨어 어루만지는 손의 기적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품이
참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이나 인터뷰를 번번이 물리쳤다.
10여년 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다.
병원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다.
월 10만원씩 나오는 장기봉사자 식비도 마다해
병원측이 "식비를 안 받으면 봉사자 자격을 잃는다"고 해
간신히 손에 쥐여줄 수 있었다.
두 수녀는 이 돈은 물론,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만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70세다 되신 마리안 수녀. 밝은 미소가 아름답다.
지난주 초 두 수녀를 찾아 인스브루크로 향했다. 마리안 수녀가 사는 곳은 인스브루크 시내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인 마트라이라는 작은 마을.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물어물어 집을 찾았다. 마리안 수녀는 다행히 집에 있었다.
한국에서 전달받은 소록도 주민들의 편지를 전했다.
“큰 할매, 작은 할매, 감사드립니다.”
“그토록 곱던 젊음을…, 소록도 사람들의 손발이 되어 평생을 보내신 할머니 두 분께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마리안 수녀는 편지를 읽으면서 “눈을 뜨면 한국 생각이 나고 소록도 꿈을 아직도 꾼다”고 한국말로 말했다.
두 수녀는 송별식을 요란하게 하는 것이 싫어 광주대교구 주교에게만 자신들의 뜻을 알렸다.
그러고는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짐 20kg만 들고,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소리 없이 소록도를 떠났다.
두 수녀가 돌아오자 가족들은 반색을 했다. 마리안 수녀의 여동생은 집 3층에 언니를 위한 보금자리를 꾸몄다.
마가레트 수녀의 형제들도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줬다.
두 수녀는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쪽빛 물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0대 후반부터 40년을 넘게 산 소록도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젠 오히려 오스트리아가 '낯선 땅'이다. 마리안 수녀는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등록 신고도 새로 하고, 친지와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얼굴을 익히고 있단다. 아직도 저녁 식사는 한식으로 한다.
3평 남짓한 방 안은 한국에서 가져온 자그마한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방문에는 붓글씨로 쓴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문구도 붙어 있었다.
"평생 마음에 담아 두고 사는 말"이라고 마리안 수녀는 설명했다.
그의 삶은 이 좌우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소록도를 찾은 것은 1962년.
처음부터 평생 소록도에서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처음 갔을 때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됐고. 약도 없고, 돌봐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수녀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했다. 약이 부족하면 오스트리아의 지인들에게 호소해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에서 실어 날랐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영양제며 분유도 부지런히 구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록도에선 계속 아이들이 태어났다. 한센병 환자인 부모들과 함께 지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두 수녀는 보육원을 세웠다.
가난한 살림살이라 옷은 직접 해서 입혔다. 아이들이 여섯 살이 돼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으면 육지의 보육원으로 보냈다.
마가레트 수녀와 마리안 수녀
할 일이 지천이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 두 수녀는 가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했다.
마가레트 수녀의 언니 트라우데 미코스키(73) 씨는 "소록도에선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한다고 들었다"면서 "마가레트가 언젠가 재로 변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고 말했다.
시련도 있었다. 3년 전에는 마리안 수녀가 대장암 진단을 받아 한국과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3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많이 아팠어요. 그래도 소록도 사람들이 기도해 준 덕분에 나았지요."
그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졌다.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다.
"더는 우리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요. 40년 동안 함께 일한 한국인 간호원장이 은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가레트와 함께 이제는 한국을 떠나도 되겠다고 결심했답니다."
마리안 수녀를 만난 뒤 마가레트 수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수녀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마가레트 수녀의 아파트뿐 아니라 남동생, 언니의 집을 계속 찾아갔지만 결국 언니를 만나 근황을 듣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마리안 수녀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의 손에 알사탕 몇 개를 꼭 쥐여주었다. 밥을 못 차려 줘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그러고는 소록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20대 꽃다운 나이에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타지에 오셔서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실때 까지 봉사를 해 주신 두 수녀님께 종교 개념을 떠나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원문 : 두 수녀님, 43년간 소록도봉사 외국인 수녀 2명 편지 한 장 남기고 홀연히 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