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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그녀의 맑고 순수한 색채
    문화 & 라이프/예술 & 문화 2018. 4. 8.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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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미인 화가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Zinaida Serebryakova), 그녀의 맑고 순수한 색채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그녀는 그녀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자화상속에서 그녀의 솔직한 모습 약간 교활해보이기도 하며 여성으로서의 순결함과 우아함, 그리고 그녀가 가진 여성적인 매력으로서의 파워를 표현한다. 1900년대 게다가 프랑스도 아닌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던 그 시베리아의 러시아에서 이렇게 솔직하고 용감했던 아름다운 알파걸이 있었다는데에 대해서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반했다. 그녀의 그림속에 나타난 그녀의 여리지만 매력넘치는 미소, 그리고 밝게 빛나는 백옥같은 그녀의 이마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그림속에서 별처럼 빛난다.


    자화상 화장대 앞에서 1909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그녀의 자화상속에서 나타난 그녀는 마치 현대시대의 전문모델같은 모습으로 익숙하고 세련된 자세로서 그림을 보는 사람을 유혹하듯이 고혹적이고 매력적인 자세를 취한다. 또한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녀 자신 앞에 놓아둔 그녀의 소품들 화장품들 또한 그녀를 의도적으로 돋보이게 만든다. 그녀 내부에 모델처럼 자신을 매혹적으로 카메라에 비치게 만드는 타고난 끼와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백색의 옷은 그녀를 겸손과 흰색으로서 지배하는 아름다운 신부로서의 모습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녀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흰색의 옷과는 대조적으로 도발적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 상태는 서로 어울림으로서 아름답게 빛난다.


    그녀는 대체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비록 한때의 우울이 있었지만 그녀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1900년대 러시아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그녀는 어느 남자들보다도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녀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가 타고났던 낙천적이고 선량하며 동시에 여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용감했던 성격 탓도 있었다. 그녀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자화상 소녀에 대한 연구 

    러시아 샹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국립 미술관


    러시아 여류화가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예술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가정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건축가였으며 건축가들의 사회의장인 동시에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일원이었다. 그녀의 삼촌 알렉산드레 베노이스는 꽤 유명한 화가였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 에브게니 니콜라이에비치 란세레이는 유명한 조각가였다. 또한 알렉산드레 베노이스의 자매였던 그녀의 어머니도 그림을 그리는 소질이 있었다.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는 그녀의 집안에 가득한 예술적 풍취에 의해서 화가가 될 소질을 이미 어릴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의 아버지와 어머니 뿐만 아니라 그녀의 형제중의 하나인 니콜라이 에브게니에비치 란세레이 또한 재능있는 건축가였으며 그녀의 형제인 란세레이가 지은 미술관은 러시아에서 중요한 예술적 문화재가 되었다. 러시아인이자 영국인이었던 배우이자 작가 피터 유스티노프 또한 그녀와 인척관계에 있었다. 그녀의 예술적 소질은 이미 타고났던 것이다. 그녀는 어린시절 러시아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며 1902년과 1903년에 이탈리아에서 미술을 배웠다. 1905년에는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같은 해에 러시아로 돌아온 세레브랴코바는 철도 기술자인 그녀의 사촌인 보리스 세레브랴코바와 결혼했다. 그녀의 예술은 젊은 시절부터 계속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사랑의 시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녀의 첫 시도는 대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젊고 여성이었지만 표현에 있어서 용감했고 그녀가 표현하려는 주제에 대해서 망설이지 않았다.


    용감한 그녀, 여류화가여서 아쉬울 따름이다. 여성이 아니었다면 더 유명했을텐데, 여류화가 게다가 프랑스도 아닌 러시아에 묻혀있던 한 여성, 하지만 그녀는 표현하려는 주제에 대해서 망설임이 없었고 예술에 대해서 그녀는 용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그림들 자화상들과 아름다운 삶의 순간들을 포착한 그림들과 일부 누드 그림들이 현재도 익히 알려져 있다.


    딸들과 함께 있는 자화상 1921년

    캔버스에 유채


    다정한 가정스런 분위기를 표현하는 이 그림속에서 그녀가 낳은 앙증맞은 딸들과 함께 그녀는 그림속에서 등장한다. 어느 아름다운 모델에 못지 않은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그녀는 그림속에서 그녀의 딸들과 함께 자상한 어머니로서 등장한다. 포근하고 아름다운 이 그림은 밝고 화사하고 따스하다. 그녀는 먼저 그녀 자신의 자화상들을 그림으로서 표현했고, 이 자화상들은 곧 유명세를 탔다. 1914년에서 1917년동안의 그녀의 삶은 그녀 인생에서의 전성기였다. 세레브랴코바 그녀 자신의 자화상들과 함께 이 시기에 그녀는 그녀가 살고 있던 농촌마을의 농부들과 농촌 소녀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그림들은 따스하고 아름다운 동시에 농촌의 전원마을이 가지고 있는 대자연의 위엄스런 모습을 담고 있다. 물론 세레브랴코바 그녀 자신도 여성이기에 되도록이면 여성의 모습들을 그림속에 많이 그려냈다.


    자화상 1921년

    캔버스에 유채


    세레브랴코바는 동양의 모습을 표현하는데도 도전했다. 그녀는 비록 여성이지만 도전하는데 있어서 결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인도, 일본, 터키의 자연과 함께 어울리는 아름답고 풍유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그림에 표현했다. 이 시절까지 그녀의 삶은 행복했고 풍요로왔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했고 그녀의 삶은 바뀌었다. 그녀의 남편 보리스가 볼셰비키 교도소에서 발진티푸스로 죽었다. 그녀는 수입이 없었고 그녀가 양육해야할 4명의 아이들과 그녀의 병든 어머니를 보살펴야 했다. 그녀는 값비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유화를 포기하고 숯과 연필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도 그녀의 딸들도 다시 인생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딸 타티야나는 발레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었고 세레브랴코바 그녀도 파스텔 그림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파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에카테리나 헤이덴레이체의 초상화 1923년

    종이에 파스텔

    러시아 샹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국립 미술관


    파리 시절, 파리에서 그녀는 많은 벽화들을 그렸다. 그녀는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러시아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어머니를 걱정했던 그녀의 아들 알렉산드레와 그녀의 딸 카테리네가 파리로 와서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이 이유로 그녀의 4명의 아들과 딸들은 두명씩 분리되었지만 그녀의 아들과 딸들은 잘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과 딸들에 대해서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세레브랴코바는 마지막 여생을 여행으로 보낸다. 세계의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그녀가 그 나라에서 바라본 풍경과 여성들을 그린다. 여행과 그림, 그녀의 남은 여생의 즐거움이었다.


    아프리카와 모로코에서 그녀는 아프리카의 풍경에 매료되었고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 아프리카의 아랍여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묘사한다. 그녀가 주로 표현하려고 했던 지향점은 이 대자연의 모습과 대자연에서 어울리는 바로 자기자신과 같은 여성들의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던 그녀는 러시아로 돌아가자마자 유명해졌다. 그녀는 러시아에서 보티첼리 또는 르느와르와 같은 동급의 화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를 지카 또는 시나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녀는 일에 충실한 알파걸인 동시에 집안에도 헌신적인 가정에도 충실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의 남편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과 딸들도 그녀를 믿음직한 어머니로 생각했다. 그녀의 소중한 딸들에 둘러싸인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따스하고 아름다와 보인다. 그녀의 마음이 이 대자연처럼 그녀가 표현하려 했던 이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처럼 선량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다정한 어머니로서 그녀의 딸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하고 포근해진다.


    태양에 의해 빛나다 1928년


    그녀의 자화상들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처럼 그녀의 그림들도 아름답다. 그녀는 조명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적절한 조명을 사용하여 그녀 자신의 피부를 하얗게 만든다. 그녀는 그림의 조명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으며 그림을 조명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림속에서 확실히 아름다운 요정처럼 돋보이며 그녀 자신의 모습을 뽐낸다.


    그녀는 유성페인트에 대해서는 싫어했다. 한때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가난 때문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유화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그림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되도록이면 모든 장르의 그림들을 시도한다. 석판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소재를 사용하여 모든 주제의 그림들에 도전했다. 그녀는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으며 그녀의 작업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으며 그녀는 용감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용감했다.


    2명의 농부 소녀들 1915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샹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국립 미술관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그녀의 모습들, 그녀의 인생속에서 그녀의 그림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속에서 그녀의 밝고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용감한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밝고 용감하게만 보이는 그녀도 때때로 그녀자신이 우울했음을 털어놓았다. 세레브랴코바 그녀 자신 스스로 말하길, "나는 활동적인 화가이다. 항상 활기에 차있으며 긍정적이다. 나는 밝고 항상 내 일에 대해서 열정에 차 있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이 희극배우일 뿐임을 발견한다."


    이렇게 말한 그녀,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용감하고 아름다운 여성도 때때로 우울한 기분에 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러한 때때로의 기분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밝고 용감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빛 뿐만 아니라 어둠의 모습도 인정해야 한다. 빛을 인정하듯이 어둠도 인정해야 한다. 빛이 자연스러운 우주의 모습이듯이 어둠도 자연스러운 우주의 모습이다. 두 가지 측면을 인정할때 진정한 낙천주의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빛이 어둠을 뚫고 가듯이 그림을 그리려면 캔버스를 인정해야 하듯이 삶을 살아가려면 어둠을 인정해야 한다.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 빛을 인정하듯이 어둠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밝은 빛으로서 세상을 살기 위해서이다.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그녀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아르누보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유지했다. 비록 그녀가 그 누구의 스타일을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그림들 속에서 르느와르의 그림들이 지니고 있는 따뜻하고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녀는 꽤 안정된 집안에서 자라났다. 매력적인 소녀들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집안의 안정된 보호를 받으며 자라났다. 그녀는 대채로 그녀의 인생에 대해서 낙천적이었고 항상 성실했다. 일하는 화가로서도 그녀의 집안의 어머니로서도 그녀 남편의 아내로서도 그녀는 항상 성실했다.


    아침식사 1914년


    그녀는 그녀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남편과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나 또한 내 남편과 가족들에게 사랑을 주고 있다. 나는 모두에게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나는 뜻밖의 삶을 살고 있으며 나는 행복한 마법의 삶을 살고 있다."


    뜻밖이었을까? 그녀의 행복은 그녀 자신의 낙천적이고 성실한 삶의 자세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녀는 행복을 누릴만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자화상들은 모두 밝은 색채를 뽐낸다. 어느 그림도 어두운 그림은 한점도 없다. 밝고 산뜻하며 르느와르의 그림이 지니고 있는 밝고 순수한 색채를 뿜어낸다. 또한 마네의 그림같은 우아함이 돋보인다. 그녀는 그녀 자신과 그녀와 가깝게 지내던 그녀의 가족들과 그녀의 친구들을 그림속에 담아냈다. 그녀는 사람들이 가진 젊음과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녀는 그림의 중심인물 뿐만 아니라 그림의 배경들이 되었던 자연과 초상화에도 신경을 썼다. 그녀가 자화상속에서 사용한 작은 소품들의 용도를 보면 그 작은 소품들이 그림속에서 어떻게 모델처럼 그녀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지 살펴보면 그녀는 그림의 중심인물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소품과 배경을 사용할줄 아는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녀의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서 그녀 자신의 카논(이상적인 인체비례)을 창조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카논에 따라서 그녀 자신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 카논의 모습은 강렬한 밝고 아름다운 순수로 가득 차 있다. 그녀의 아이들 그림에서 그녀의 아이들은 섬세하며 강하고 온순한, 독립된 에너지가 가득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릴때 심리학도 활용했다. 그녀는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지식에도 밝았다.


    그녀는 자유로운 여성이었고 화가라는 직업을 택함에 있어서 그녀 스스로의 긍정적인 힘을 용감하게 믿었으며 그 밝은 힘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글 쓰기,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고 모든 예술분야에 있어서 관심이 많았다. 남편이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그녀는 그녀 남편곁에 낭만적인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항상 함께 했다. 아름다운 들판의 황금 물결, 지평선의 깊은 푸른색, 그녀의 그림은 밝고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의 밝고 순수했던 긍정적이며 용감한 삶처럼, 그녀의 그림들도 밝고 순수한 긍정적이며 용감한 따뜻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한 여름의 푸른 하늘처럼 봄의 따뜻한 꽃처럼, 늦봄과 초여름의 맑고 순수한 색채, 밤의 빛나는 맑고 순수한 아름다움이 그녀의 그림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 출처 : 보헤미안 2008. 3.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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